
멀고도 가까운.
이 책은 너무 잘 읽힐 때는 선 채로 눈을 떼지 못하게 읽히기도 하고 어쩔 땐 내게 너무 넘쳐서 소화되지 않기도 했다.
결국 다 읽지 못하고 책모임에 참여하게 됐다.
웬만하면 이해는 못해도 글자만큼은 눈에 다 담고 참여하려고 했는데 그게 안됐다.
오늘은 모임 진행 방식에 변화가 있었다. 책을 읽고 각자 질문 하나씩 생각해오기.
작가는 ‘살구’ 이야기로 어머니와의 관계에 대해 운을 뗀다. 살구.
질문을 준비해오자라는 숙제를 받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그 ‘살구’였다. 어머니와의 관계 그 자체가 투영된 살구.
내 질문은 ‘본인에게도 살구와 같은 것이 있는가’였다.
나에게 바로 그 ‘살구’와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게는 ‘굴비’가 있다.
냉동고에 처박혀 썩지도 먹지고 나누지도 못한 채 그 안에 박제되어버린 굴비.
리베카 솔닛의 살구가 어머니와의 관계라면 냉동굴비는 나와 아버지와의 관계다.
그 ‘살구’는 설탕에 절여지고 술이 되고 그러나 썩어지기도 하는 다양한 시도와 변화를 맞이하며 ‘해결’된다.
내 ‘굴비’는 어떻게 될까.
나의 굴비를 해결하기 위해선 ‘용서와 화해’가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굴비를 해동하게 하고 굽게 하고 먹게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쫄보다. 용서와 화해에는 가차없는 쫄보다. 그래서 더 무심하고 잔인하다.
내 굴비는 어쩌면 해동 한 번 되지 못한 채로 쓰레기통에 처박힐지도 모른다. 굴비는 아무 잘못도 없지만 그 굴비를 거쳐간 마음들 때문에 너무 무거운 존재가 되어 버렸다.
토론 중 한 분의 말이 가슴에 지긋하게 얹혀진다.
“화해의 대상이 없어지기 전에 마음 속으로나마 (혼자서라도) 화해를 해 보는게 어떨까.”
용서와 화해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결국 영원한 쫄보가 될지도 모른다.
내 방식의 합리화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나는, 나를 보호하고 이렇게 살아 내기도 했다. 아니,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완주를 한 다음에 다시 처음부터 읽어봐야겠다.
나를 위해서.